writings / novels
[ 닝닝한 계절 ]
일년에 딱 한번. 그의 생일이면 나는 지난 일년간 숨겨왔던 내 마음의 봉인을 푼다. 그와 함께 여행했던 이곳, 제주도에 와서 그와의 여행길을 따라 걷는다.
그러면 또다시 앞으로 일년 그를 향한 마음을 숨길 수 있는 힘이 생기곤 했다.
그를 처음 만난 곳은 부산이었다. 하지만 나는 처음 만난 곳보다도 그와 함께 한 첫 여행지인 이 곳 제주도를 더 선명히 기억한다.
함께 드라이브를 하던 해안도로의 햇살과 바람. 눈이 소복히 쌓인 사려니숲의 고요함. 카페에서 바라보던 노을진 사계해변과 기괴한 암석들. 그리고─ 내 손을 꼭 잡아주던 그의 온기. 미소. 눈빛.
그러니까 내게 제주도는 사랑과 낭만이 가득한 여행지가 아니라 내 마음을 정리하고 가다듬는 마음의 제단 같은 곳이다. 제단이란 표현이 좀 웃기긴 하지만 그 말만큼 내 상태를 깔끔하게 표현해주는 단어는 없을 것 같다.
그렇게 2025년 3월 17일. 나는 올해도 언제나처럼 제주도로 향하는 비행기 안이다. 이날만큼은 퍼스트클래스를 끊은 나는 주변을 살폈다.
평일 낮이라 그런지 아니면 날씨가 좋지 않아서인지 거의 혼자서 일등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날씨가 좋지 않아 결항이 될까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결항은 되지 않았다.
나는 친절한 미소를 띄는 승무원 분께 안대 하나를 부탁해 받은 다음 시트에 몸을 묻었다. 제주도까지 한시간 정도 걸리는 짧은 비행이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멀미약까지 먹은 탓에 졸음이 몰려왔다.
얼마나 잤을까. 희미하게 들리는 비행기 소음과 기장의 안내방송에 설핏 잠에서 깬 나는 천천히 시트를 움직인 다음 안대를 벗었다. 슬쩍 창문을 열어 보니 어느새 구름 틈 사이로 이호테우 해변의 빨간 말이 언뜻 보였다.
공항을 나서자 바람 냄새부터 달라졌다. 희미하게 바다냄새가 섞인 바람에 코트 깃을 여미며 나는 공항 딜리버리로 예약한 렌터카로 향했다.
공항 주차장 B-31. 문자로 받은 번호를 몇 번이나 확인하며 줄을 따라 걸었다. 비슷한 색의 차들이 나란히 서 있었고, 바람에 흔들리는 번호 표지판이 가볍게 소리를 냈다. 트렁크를 여는 소리와 문 닫히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섞여 들렸다.
B-30을 지나 B-31 앞에 멈춰 섰을 때, 차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유리창 위에는 내 이름이 적힌 작은 종이가 끼워져 있었다. 문을 열자 실내에는 새 차 특유의 냄새와 시트러스 계열 차 클리너 냄새가 차가운 공기에 스며 있었다.
나는 가방을 조수석에 내려놓고 운전석에 앉았다. 시동을 걸자 내비게이션 화면이 켜졌다. 히터부터 트는데 익숙한 음성이 목적지를 물었다. 잠시 대답하지 않은 채 사이드미러를 조정하다가, 주차장을 빠져나오는 화살표를 따라 천천히 차를 움직였다.
그와 끝난 뒤, 그의 첫 생일날. 그때도 제주도에 와서 렌트를 했었다. 생애 첫 렌트였고 렌터카에 금방 적응을 못해 그해 제주도에서의 시간은 내 뜻처럼 흘러가지 못했다. 그 뒤로 6년. 렌터카에 적응할 시간을 갖기 위해 나는 공항 딜리버리 예약을 하기 시작했다.
공항 주차장을 빠져나오는데 하늘이 심상치 않았다. 렌터카가 거센 바람에 살짝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안전띠를 다시 한번 확인하곤 엑셀을 밟았다.
비가 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도로도 젖어 있지 않았고, 그저 바람만 거칠 뿐이었다. 나는 창문을 조금 내린 채로 공항을 벗어나 이호테우 해안도로를 탔다.
렌터카에 적응할 겸 빨간 말로 가는 것이 제주도에서의 첫 일정이었다.
해안도로를 진입하고 10분쯤 지났을까. 빗방울이 하나 둘 유리 위로 내려앉았다. 성긴 빗방울이 앞유리에 닿았다가 금세 흘러내렸고, 와이퍼가 한 번, 두 번 리듬을 만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비 사이에 다른 감촉이 섞였다. 둔탁하게 부딪히던 소리가 가늘어졌고, 흘러내리지 못한 것들이 유리 위에 잠시 머물렀다.
눈이었다. 비와 섞인 눈은 쌓이지 않았고, 대신 질척하게 도로 위를 잠식했다. 검은 아스팔트 위로 흐릿한 색이 번졌고, 타이어가 지나갈 때마다 미세한 소리가 났다. 깨끗하지도, 완전히 흐트러지지도 않은 상태로 길은 계속 이어졌다.
나는 속도를 조금 줄인 채 그대로 달렸다.
이맘때의 제주는 계절이 분명하지 않다. 비라고 하기엔 늦고, 눈이라고 하기엔 너무 가벼웠다. 반쯤 열린 창문을 타고 비처럼 떨어지다 눈처럼 흩어지는 것들이 바람에 실려 얼굴을 스쳤고, 하늘은 끝내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은 색을 유지했다. 도로 위에는 물기가 먼저 고였고, 그 위로 아주 늦은 눈이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가 금세 사라졌다.
그 모습은 가는 계절, 오는 계절 둘 다 놓지 못해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
이맘때의 제주는 늘 닝닝했다. 바다는 잔잔하지도 거칠지도 않았다. 파도는 소리를 낮춘 채 밀려왔다가, 자신이 무엇이었는지 말하지 않고 되돌아갔다. 바닷가 돌들 위에는 하얀 흔적이 잠시 남았다가, 다음 물결에 지워졌다. 눈이라고 부르기에는 얇았고, 비라고 하기에는 너무 느렸다.
나는 창문을 닫고 잠시 빨간 말 등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등대에서 조금 떨어진 주차장에 차를 세운 나는 핸들 위에 몸을 기댄 채 저 멀리 흐린 날씨 탓에 더 짙게 보이는 빨간 말을 말없이 바라봤다.
잠깐 열어둔 창문 틈으로 어느새 새 차 냄새와 크리너 냄새가 빠져나갔다. 히터에서 나오는 공기는 살짝 텁텁하지만 코끝을 자극하지 않았다.
제주도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빨리 볼 수 있는 바닷가는 사람이 제법 보였는데 오늘은 날씨 탓인지 한명도 없었다.
꼬르륵─ 그때였다. 눈치없이 차안에 울려 퍼지는 위의 신호에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 이 근처에 맛집이 있었던 걸 기억하곤 시동을 걸었다.
언젠가 그와 함께 오면 가기로 약속했던 곳.
이곳엔 너무 많은 약속들이 남겨져 있었다. 대체로 지켜지지 못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시간 속에 해묵은 기억처럼 먼지가 잔뜩 낀 채 잠들어 있다가 지금처럼 순간 순간 뛰쳐나왔다.
음식점에 도착한 나는 시동을 끄지 않은 채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와이퍼를 바라봤다. 왜앵─ 와이퍼가 움직일 때마다 모터음 위로, 어느새 굵어진 빗줄기가 유리창을 때리는 소리가 겹쳐졌다. 바람도 거센지 음식점 주변을 감싼 나무들이 이리저리 가지를 휘청였다.
그 모습만 봐도 몸에 한기가 돌아 나는 히터를 더 세게 조정했다.
꼬르륵─ 여전히 눈치없는 위장은 신호를 보내고 있지만 비를 뚫고 안으로 들어갈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핸들을 오른손 검지로 톡톡 두드리며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음식점 한켠에 세워둔 차를 다시 돌렸다. 이런 날은 드라이브 스루가 제격이었다.
해안도로를 타다 보면 DT 카페나 주유소 간단한 식사가 가능한 곳들을 자주 본다. 나는 그 중에 제일 가까운 곳으로 들어가 간단하게 샌드위치와 커피를 사서 카페 한켠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시동을 끄지 않은 채 안전띠를 풀고 샌드위치부터 집어 들었다.
포장지를 열자 먼저 베이컨의 짭짤한 냄새가 올라왔다. 막 따뜻하지는 않았지만, 눅눅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한입 베어 무는 순간 바삭한 소리가 먼저 났고, 뒤이어 토마토의 차가운 과즙이 입안에 퍼졌다.
베이컨의 기름진 맛을 상추가 바로 잡아줬고, 마요네즈는 그 사이를 조용히 메웠다. 맛이 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비어 있지도 않았다. 짠맛과 신맛, 차가움과 바삭함이 순서대로 지나갔다.
나는 일부러 천천히 씹었다. 한입 한입 씹는 행동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샌드위치를 삼키고 나면 입안 남는 소금기도. 커피 한 모금으로 그 맛을 정리하는 것도. 먹는다는 행위가 주는 원초적인 행복을 그 무엇도 신경쓰지 않고 오롯이 누렸다.
샌드위치를 반쯤 먹었을 때, 눈치없이 계속 꼬르륵 거리던 위장은 어느새 조용해졌다. 배가 어느 정도 채워져서인지, 아니면 더는 신호를 보낼 이유가 없어진건지.
나는 샌드위치를 들고 창밖으로 흐려진 바다를 바라봤다.
파도가 제법 셌다. 여전히 일정한 리듬으로 울리는 와이퍼 사이로 흘러내리는 덩어리는 이제 비로 바뀌어 있었다. 묵직한 소리로 유리창을 때리는 빗방울을 바라보다가 그와 처음으로 함께 보냈던 밤으로 이어졌다.
나도 그도 처음이었다.
처음이란 단어는 그렇다. 서툴고 거칠고 그래서 더 애틋하고 풋풋하고.
둘 다 어색한 웃음을 흘리면서도 서로를 바라보는 눈만큼은 피하지 않았다. 서로 잡은 손도 절대 놓지 않았다. 서툴게 서로의 몸을 부딪혔고 그 밤은 내가 보낸 그 어떤 밤보다 달콤하고 사랑스러웠다.
끼이이이익─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들렸다.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주변을 살폈다. 드라이브 스루를 마치고 막 주차장으로 들어서던 차가 보였다. 빗길에 속도를 줄이지 않아서 급정거를 한 듯 싶었다. 멈췄던 차는 이번엔 속도를 천천히 유지하며 주차장 한켠에 정차했다.
요란하게 들리던 브레이크 소리가 멈추자 굵은 빗방울이 유리창을 때리는 소리만 다시 공간을 채웠다. 나는 조금 전 소음에 놀라 무릎에 떨군 샌드위치를 집어들었다. 다행히 포장지로 고정이 된 상태라 흐트러지거나 하진 않았다. 잠시 샌드위치를 잘 싸서 커피 거치대 쪽에 잠깐 내려놓고 아까 드라이브 스루한 종이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허벅지 부근에 살짝 묻은 베이컨의 기름을 대충 닦았다.
상황을 정리하며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비는 여전히 거세게 쏟아지고 있었다. 창 밖으로 들리는 빗소리에 순식간에 기억은 꿈결처럼 멀어졌고 남은 것은 커피향과 베이컨의 기름냄새였다.
나는 다시 샌드위치를 집어 남은 것을 재빠르게 해치웠다. 커피로 입안의 소금기를 헹구고 남은 포장지를 종이가방에 넣어 정리하고 조수석 쪽 창문을 살짝 열었다. 빗줄기가 새어들어오긴 했지만 그래도 히터의 텁텁한 공기에 엉킨 음식냄새가 천천히 빠져나가고 축축한 비냄새가 차안을 채웠다.
그 냄새는 바다의 짠기와 눅눅할 때 나는 약간의 쿰쿰함과 히터에서 나오는 텁텁함이 섞여 있지만 창문 틈으로 비와 함께 새어들어오는 찬기가 그 모든 것들을 기분 좋게 감싸고 있었다.
차는 어느새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서쪽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타자 어느새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제주도는 참 이상하다. 동서남북. 어디로든 이어져 있고 각각 서로 다른 풍경과 향과 맛을 지녔다. 아무리 길어봤자 두시간 안에 이동 가능하고 계획만 잘 짜면 짧은 시간 안에 그 서로 다른 맛과 향을 모두 경험할 수 있다.
도로를 따라 내려가다 보니 벌써 바다 냄새가 달라졌다. 북쪽의 바다내음이 바람에 희미하게 스며드는 짠기라면, 남쪽으로 갈수록 그 냄새는 조금 더 진해진다. 짠기는 옅어지고 대신 해조류가 햇볕에 마르며 남긴 비릿함이 섞였다. 창문을 조금 더 내리자 코를 찌르는 그 냄새가 차 안으로 들어왔고, 나는 그 냄새를 깊게 마셨다.
비릿하지만 악취는 아니다. 수산시장에서 느껴지는 쿰쿰함 섞인 비릿함이 아니라 바닷가에서 느낄 수 있는 그 특유의 비릿함에는 희미하게 단향이 섞여 있었다.
비는 어느새 그쳤다. 날씨는 여전히 흐리지만 비가 그치자 세상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풍경 속에 사람들의 소란함이 섞이기 시작했다. 신호에 걸려 잠시 멈추자 어디서 달큰한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기름냄새도 섞였다. 갓 튀겨낸 빵인지 아니면 설탕이 눌어붙은 과자인지 알 수 없는 향이었다.
배는 이미 채워졌지만, 그 냄새에 혀가 촉촉해졌다. 나는 괜히 혀로 입술을 한번 훑고는 거치대 꽂아둔 컵을 들었다.
아까 주문한 핫 아메리카노는 어느새 식어있었다. 핫 아메리카노가 식으면 향도 맛도 죽을 것 같지만 오히려 향이 은은해지면서 맛은 더 올라온다. 뜨거울 땐 잘 느껴지지 않는 산미가 입안을 기분좋게 헹궜다.
그 사이 신호가 바뀌고 나는 천천히 엑셀을 밟았다. 차가 천천히 움직이면서 방금 전 그 달큰한 냄새가 스치듯 입안에서 코로 올라오는 커피의 향에 어우러졌다.
날씨는 여전히 흐리지만, 엑셀을 밟는 발이 조금 느슨해졌다. 굳이 세게 밟을 이유는 없었다. 생각보다 먼저 몸이 말했다. 나는 저항하지 않고 몸의 언어대로 속도를 조금 더 줄였다.
계기판에 55km/h라고 찍혔다. 흐릿해지던 풍경이 조금 선명해졌다.
그 뒤로 제주도는 조금 더 가깝게 말을 걸었다. 맛으로도. 향으로도.
말린 생선의 짠내, 귤 껍질을 벗길 때 터지는 산뜻한 향, 비가 그친 뒤, 아직 마르지 않은 돌담에서 올라오는 흙내.
스치듯, 그러나 확실하게 자신들을 알리는 냄새들이 마음 속으로 스몄다. 그때마다 나는 속도를 늦추거나 깜박이를 켜다 말거나 했다.
다만─ 멈추지는 않았다. 이상하게도 이 곳은 늘 이렇게 나를 붙잡고 또 놓아준다. 손을 잡지는 않으면서 계속 어딘가를 바라보고 어딘가로 향하게 만든다. 나는 핸들을 쥔 손에 힘을 풀었다. 버튼을 조작해 창문을 다시 닫았다.
냄새는 멀어졌고, 차 안에는 다시 히터 바람과 커피향만 남았다.
차는 어느새 김녕 해안도로를 타고 있었다. 도로 바로 옆에서 파도가 치는 모습이 보였다. 그쳤던 비가 다시 내렸다. 보라빛이 섞인 회색빛 바다 위로 떨어져 내리는 가는 빗줄기를 한입에 삼키는 파도가 보였다.
파도는 멈추지 않고 굉음을 내며 해변으로 밀려왔고, 그 소리가 차 안의 고요함을 잠식했다. 나는 와이퍼 속도를 최대로 올렸다. 빗물이 휩쓸려 지나간 유리창 너머로, 파도의 흰 거품에 저 멀리 수평선이 일그러졌다.
문득, 그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넌 꼭 제주도 날씨 같아."
그 말을 할 때 그의 눈빛은, 빗물에 젖은 해안도로처럼 눅눅하고 알 수 없는 색을 띠고 있었다. 젖어 있으면서도, 어느 쪽으로도 주저앉지 않았다.
사랑도 미움도 아닌, 딱 그 중간 어디쯤…
그는 ‘제주도가 확실히 계절이 분명하지 않지…’ 라며 수긍했다.
띠띠띠─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하니 엄마였다. 바닷바람이 빗줄기에 섞여 얇은 유리와 철판을 뚫고 들어왔다.
창문을 닫아도, 히터로 내부 공기를 덥혀도 손끝에서 느껴지는 한기에 나는 가만히 울리는 휴대폰을 슬쩍 보고는 마침 앞쪽에 카페가 보였다.
카페 앞에 차를 세우고 시동을 껐다. 와이퍼가 멈추자 갑자기 세상이 멈췄다. 차체를 감싸는 빗소리는 여운을 남기며 사그라들었고 바람 소리도 유리창에 막혀 희미한 잔상만 남았다.
안전띠를 풀며 크게 심호흡을 한 나는 어느새 조용해진 휴대폰만 챙겨 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깥 공기가 몸 안으로 밀려들었다. 그 뒤를 이어 비에 젖은 모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젖은 나무, 비를 머금은 돌, 바다 쪽에서 불어온 짠기까지 한꺼번에 섞여 있었다.
발을 내딛자 운동화 바닥이 질척이는 소리를 냈다. 고개를 조금 숙인 채 몇 발자국 걸어 문 앞에 도착한 나는 그대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훈기가 온몸을 감쌌다. 히터 바람과 사람의 온기가 공기에 섞여 있었다. 바깥의 눅눅함은 어느새 사라졌다. 주변을 살피자 유리창에 낀 성에가 보였다.
커피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탁탁탁─ 그 소리와 함께 고소한 커피향이 서서히 카페 안으로 퍼졌다. 그 냄새를 쫓아 발걸음을 옮겼다. 커피향 위로 우유 거품의 부드러운 고소함이 더해졌다. 괜히 코로 한번 더 숨을 들이마셨다. 바닥에 신발 자국이 흐릿하게 여기저기 보였다. 누군가의 흔적들이었다. 나는 괜시리 그 흔적들에 맞춰 발걸음을 옮겼다.
카운터 쪽에서 분주한 소리가 들렸고, 스피커에서는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어디선가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멜로디가 나른하게 카페 안을 다독이고 있었다. 느린 멜로디 박자에 맞춰 발걸음도 느려졌다.
창가 쪽 자리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성에가 낀 유리창 너머로 해안도로와 바닷가 풍경이 흐릿하게 뭉게지고 있었다. 스치듯 그 모습을 눈으로 훑어내린 나는 이내 가장 안쪽 창가 자리에 앉았다.
의자가 바닥을 끄는 소리가 났다. 습기를 먹은 코트를 벗어 옆 좌석 의자에 걸고 나니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손에 남은 한기는 나무 테이블 위에 닿자 서서히 풀렸다.
한쪽에 정리된 메뉴판을 집어들었다. 주인이 직접 그린 그림과 아기자기한 손글씨가 귀여운 메뉴판이었다. 나는 한참을 메뉴판을 보다가 메뉴판을 놓고 카운터로 향했다.
이미 무엇을 마실지는 정해져 있었다.
“따뜻한 스팀밀크 한잔이요. 그리고 아메리카노 뜨거운 거 한잔이랑 귤껍질 초콜릿도 주시겠어요?”
주문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자 뿌옇게 성에가 앉은 창 표면에 맺힌 빗방울이 긴 줄을 남기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빗방울들이 흔적을 남기며 흐르다 서로 뭉쳐지고 또다시 흐르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빗방울 사이로 일그러진 바깥 풍경이 수채화처럼 일그러져 맺혀 있었다.
카톡─ 휴대폰이 울렸다. 나는 코트 오른쪽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 전화 안 받네.
카톡을 확인하니 엄마였다. 답장을 누르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이번에도 엄마다.
테이블 위를 오른손 검지로 톡톡 두어번 친 나는 휴대폰을 들어 통화버튼을 눌렀다.
“응.” ─ 딸. 제주도 잘 도착했어? “응.” ─ 아까 전화했더니 안 받대? “운전 중이였어.” ─ 그래? 진현이가 올때 공항에서 마음샌든가 뭔가 사다달랜다. “그거 시간 안 맞추면 먹기 힘든 거 아냐?” ─ 몰라. 누나 제주도 갔다니까 그러네. “봐서. 시간 맞으면.” ─ 알았어. 몸 조심하고. 잘 놀다 와. “네.”
통화를 끊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가 다시 코트 오른쪽 주머니에 넣고는 코트 주머니를 잘 여몄다.
드르륵─ 기다렸다는 듯이 울리는 호출기를 들고 픽업대로 가 쟁반을 들고 돌아온 나는 테이블 위에 쟁반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코트 왼쪽 주머니에서 고디바를 꺼냈다.
아까 공항 나오는 길에 면세점에서 산 거였다. 은색 포장을 벗기자 얇은 종이가 사각거렸다. 손 끝에 닿은 초콜릿은 생각보다 말랑했다. 차안 온기와 카페 온기에 슬며시 녹아내린 느낌이었다.
딱 먹기 좋은 말랑거림이었다. 나는 반으로 쪼개지 않고 그대로 입에 넣었다. 혀에 닿는 순간, 단맛보다 먼저 쌉싸름한 향이 입안을 훑으며 목구멍으로 이어졌다. 코끝에 다크 초콜릿향이 올라올 쯤 스팀밀크를 한 모금 마셨다. 우유의 온기가 초콜릿의 단맛을 확 올려줬다. 한 모금 더 마셨다. 데운 우유 특유의 향이 다크 초콜릿 향이랑 섞이며 입안의 단맛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혀로 입술에 묻은 우유 거품을 닦으며 한 모금 더 마시고 내려놓은 다음 이번에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집어들었다. 커피의 고소한 향과 함께 지방 특유의 향이 섞였다. 그리고는 입안에 남은 희미한 단맛과 우유의 부드러움 위로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따뜻하고 달콤하고 고소하고 쌉싸름하고. 꼭 제주도 날씨 같은 맛이었다.
잔을 감싸 쥐며 나는 또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팔을 지나 어깨까지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컵을 들어 컵의 손잡이 부분에 입을 대자 김이 코끝을 스쳤고, 혀를 살짝 안으로 말며 한모금 더 마셨다.
창 밖으로 들리는 작은 비 소리와 카페 안을 감싸는 느린 음악이 묘하게 맞아떨어지며 자기들 만의 속도를 만들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컵을 내려놓았다. 시선은 여전히 창 밖이었다. 카페 안은 조용했고 들리는 소라곤 오로지 빗소리와 음악소리 뿐이었다.
빗소리는 얇게, 음악은 느리게. 각자의 속도대로 서로에게 맞춰가며 흐르고 있었다.
여기서는 멈춰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적어도, 잠깐은.
띠링─ 그때였다.
휴대폰이 울렸다. 코트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갑자기 카페 안에 정적이 흘렀다.
치치치익─ 커피 머신이 커피를 짜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 🎂 ]
짧은 문구였다. 매년 자동으로 떠오르는, 지우지도 꺼두지도 않은 알림.
나는 바로 화면을 끄지 않고 잠시 그대로 두었다. 반사적으로 앞에 놓은 머그잔을 들었다. 식은 아메리카노에서 아까와 달리 산미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쌉싸름한 맛을 한모금 더 마시고 머그잔 옆 작은 접시에 올려진 귤껍질 초코렛 한알을 집어먹었다.
그의 생일.
아까 엄마가 말한 마음샌드가 떠올랐다. 진현이가 공항에서 사다 달라고 했다는 그 과자.
웃기게도 그건, 언젠가 그와 함께 제주도를 떠나는 공항을 걸으며 했던 약속 중 하나였다.
“다음에 제주도 오면 이거 먹자.” “시간 맞추기 힘들다던데?” “그래도, 같이 오면 되지.”
그때 그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었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그 ‘다음’을 맞추지 못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이런 식으로 남의 부탁처럼 내 앞에 다시 나타났다.
나는 휴대폰을 뒤집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알림은 사라졌지만 카페의 침묵은 저 멀리 사라져 있었다.
여기서는 멈춰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멈춰 있어도 괜찮다는 건 언젠가 다시 떠나야 한다는 말이었다.
나는 작은 접시에 남은 초콜릿 두알을 한번에 입에 털어넣었다. 귤 껍질 특유의 상큼함이 코를 찌르고 껍질의 쓴맛이 입안을 자극했다. 살짝 혀를 움직이자 고인 침에 초콜릿이 살짝 녹더니 이내 카카오향이 상큼함을 내리누르며 단맛이 혀끝에서부터 천천히 올라왔다.
혀로 입술을 핥으며 단맛이 주는 여운의 아쉬움을 달래고 이내 식은 우유를 커피가 담긴 잔에 살짝 섞은 다음에 빨대로 저어 그대로 마셨다.
부드러운 우유의 고소함에 식은 커피가 주는 신맛과 쓴맛이 한데 어울러져 강렬하게 목구멍을 강타했다.
이제 슬슬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비는 어느새 그쳐있었다. 코트를 집어든 채 차를 탄 나는 옆좌석에 코트를 놓고 시동을 걸었다. 차문을 닫았음에도 비 내리는 동안 누적된 눅눅함이 차안 공기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히터를 틀고 안전띠를 맨 나는 익숙한 목소리로 어디로 갈지 묻는 내비게이션을 무시하고 출발했다.
해안도로를 탄 차는 이내 마을 안쪽으로 길을 틀었다. 김녕 성세기 해변 쪽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
복잡하고 좁은 마을 길에 나는 속도를 줄이며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따라 이리저리 핸들을 돌렸다. 좁은 돌담길 양옆으로 낡은 시멘트 건물들과 제주 특유의 현무암 주택들이 띄엄띄엄 보였다. 다시 떨어지기 시작한 빗줄기에 돌담이 검고 투박한 색을 더했다. 가끔씩 지나가는 올레길 여행객들이 우산을 펴는 모습이 보였다.
차는 그렇게 10분 정도 더 울퉁불퉁한 길을 지나 마을 깊숙한 곳에, 낡은 문패가 걸린 작은 게스트하우스 앞에 멈췄다.
오늘 밤 묵을 곳. 7년전, 그와 함께 머물렀던 곳. 그 뒤로 매년 나는 이곳에 머물렀다.
시동을 끄자 세상이 조용해졌다. 와이퍼의 규칙적인 움직임이 멈추자 그 빈 자리를 유리창을 때리는 빗방울이 채웠다. 나는 눈을 감으며 운전석에 몸을 기댔다. 빗소리에 엇박자로 뛰는 내 심장 소리가 들렸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눈을 뜨자 빗줄기가 주루룩 흘러내리는 유리창이 보였다.
나는 조수석에 놓은 코트를 대충 껴입고 가방에 휴대폰과 아까 먹고 남은 종이가방을 담아 차에서 내렸다. 빗소리가 커지면서 빗물이 코트 깃을 타고 흘렀다. 젖은 아스팔트와 돌담에서 희미한 흙냄새가 비냄새에 섞였다.
트렁크에서 짐을 꺼내며 7년 전 그 날을 떠올렸다. 내 손을 꼭 잡고 트렁크에서 짐을 꺼내주던 그의 모습이 잔상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그때는 오늘처럼 비가 오지 않았다. 햇볕은 따뜻했고, 그의 손은 더 따뜻했다.
게스트하우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낡은 나무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빗소리에 살짝 뭍혔다. 따로 주인이 직접 체크인을 하지 않는 곳이라 안은 조용했다. 현관문에 코팅되어 부착된 안내문이 보였다.
나는 안내문을 마음없이 한번 훑었다. 현관 옆 작은 오픈 서랍장에서 내 이름이 적힌 열쇠를 집어들었다. 금속음이 짧게 나고 손끝에 차가운 감촉이 닿았다. 203호라고 적힌 길쭉한 플라스트 키홀더를 엄지 손가락을 쓱─ 훑었다.
현관 왼쪽의 계단을 올랐다. 좁고 낡은 나무 계단이라 밟을 때마다 삐걱였다. 그 소리는 여전했다. 7년 전의 그와 나는 이렇게 또다시 맞닿았다.
방문을 열었다. 창밖으로 김녕 해변의 흐린 바다가 조각처럼 보였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침구류도 가구들도 미니 주방과 귀여운 2인용 식탁도. 7년 전과 똑같은 풍경. 똑같은 방.
다만 7년 전과 달리 이곳에는 따스한 햇살도, 사람이 주는 온기도 없다.
트렁크를 현관 옆 신발장 옆에 뒀다. 어깨에 맨 가방도 트렁크 손잡이에 걸쳐 두고 창가로 향했다. 파도는 여전히 닝닝한 계절의 소리를 내며 밀려왔다. 바다 역시 그대로였다. 파도는 거세지만 김녕 바다 특유의 그 빛깔은 여전했다.
나는 젖은 코트를 벗어 걸고, 마른 수건으로 머리를 털었다. 그리고 침대에 앉아 천천히 생각했다.
이번 여행이 끝나면, 나는 정말로 이 마음을 영원히 봉인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 닝닝한 계절이 영원히 내 안에 머물게 될까.
창밖의 비가 조금 잦아들었다.
빗소리가 들렸다. 아니, 바람소리인가? 파도소리 같기도 했다. 아무튼 희미하게 귀를 자극하는 소리에 설핏 잠에서 깼다. 주위는 온통 깜깜했다. 창 밖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불빛이 어스름하게 방 구조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몸을 일으키려다 그냥 말았다. 엉덩이를 아슬하게 가리는 이불만 좀 당겼다. 이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그 소리마저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대로 누운 채 천장을 바라봤다. 불을 켜지 않아도 방 구조는 대충 보였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불빛 때문일까. 아니면 이 방이 이미 익숙해져서일까.
뻑뻑한 눈을 몇번 깜박이다 이내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기다렸다는 듯이 눈의 피로가 몰렸다. 몇번 더 눈을 깜박이며 눈동자를 풀고 다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더 많은 것들이 보였다. 7년 전의 햇살과 공기와 목소리.
그와 어떤 일을 했고 어떤 말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그 목소리와 햇살과 공기와 표정은 선연하게 마음에 그려졌다.
카톡.
파도인지 바람인지 모를 소리가 유난히 서늘했다. 나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겼다. 이불이 몸을 감싼 따스함이 느껴졌다.
축축한 공기 냄새, 희미한 빗소리, 그리고 몸을 누르는 이불의 무게.
머리맡을 더듬어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잘 도착했어? 거기 날씨 어때.
화면을 한 번 더 내려다봤다. 답장을 쓰지 않은 채 엄지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휴대폰을 이불 위에 올려두자 진동의 여운이 손바닥에 남았다. 이불을 조금 더 끌어당겼다. 파도인지 바람인지 모를 소리가 다시 들렸다. 화면은 어두워졌고, 방 안의 냄새가 늦게 따라왔다.
베개를 끌어안고 몸을 틀었다. 베개가 배와 가슴 사이에 끼었다. 숨이 잠깐 막혔다가 풀렸다. 다시 한번 자세를 바꾸다 말고, 이번에는 그대로 상체를 일으켰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짧게 썼다.
응. 날씨는 좀 애매해.
보내고 나서 화면을 바로 껐다. 휴대폰을 침대 위에 내려놓고, 베개를 제자리로 밀어 넣었다. 바닥에 발을 디디자 차가운 감촉이 먼저 올라왔다. 커튼을 조금 젖히자 바다 쪽 불빛이 벽에 걸렸다. 코트를 집어 들고 소매를 통과시켰다. 단추는 잠그지 않았다.
문을 열자 바람이 먼저 들어왔다. 복도 끝에서 파도 소리가 어둡게 부딪혔다.
계단을 내려가며 생각했다. 배가 고팠다.
문을 열자 바람이 먼저 들어왔다. 젖은 공기가 복도를 훑고 지나갔다. 나는 코트 깃을 세우고 계단을 내려갔다. 나무 계단이 밟힐 때마다 낮게 울렸다. 현관을 나서자 골목이 바로 이어졌다. 가로등 불빛은 드문드문 끊겨 있었고, 돌담 위로 비에 젖은 이끼가 어둡게 번들거렸다.
시간은 여덟 시를 조금 넘긴 참이었다. 편의점 쪽으로 몸이 먼저 향했다. 그런데 골목 끝에서 불 하나가 보였다. 언뜻 보니 문 위에 달린 작은 전구였다. 바람에 흔들리며 불빛이 가늘게 떨렸다. 나는 발걸음을 바꿨다.
문을 밀자 종이 가볍게 울렸다. 안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나무 테이블 몇 개, 벽에 붙은 메뉴판, 주방 쪽에서 기름 데워지는 소리.
나는 가게 안 중앙에 놓인 ㄱ자 카운터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그 중 가장 안쪽 자리에 앉았다. 의자가 바닥을 끄는 소리가 들렸다.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었다. 살짝 소매를 걷었다. 손을 무릎 위에 얹었다가 내려놓았다.
“아무거나요.”
잠깐 쉬었다가 덧붙였다.
“제일 빨리 되는 걸로 주세요.”
주인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나는 테이블 위에 시선을 두고 있다가, 문득 말을 하나 더 얹었다.
“혹시… 고소리 술도 있나요?”
주인장이 나를 한번 힐끗 보더니 말했다.
“있수다.”
그 한마디에 숨이 괜히 느려졌다.
잠시 뒤, 작은 잔과 투명한 병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나는 잔을 들어 코끝에 가져갔다. 곡물 냄새가 은근하게 올라왔다. 한 모금 마셨다. 목을 타고 내려가며 따뜻해졌다.
주방 쪽에서 접시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기름 냄새가 먼저 퍼졌다. 냄새를 맡으니 위에서 아우성을 쳤다. 위를 달래기 위해 투명한 병을 들어 한잔 가득 채웠다.
그때, 주인장이 접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오늘은 요게 빨라서.”
말끝이 조금 늘어졌다.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접시 위에는 자리돔을 말렸다가 구운 게 올려져 있었다. 껍질이 살짝 들떠 있었고, 가장자리는 눌어붙은 색이었다. 젓가락으로 건드리자 바삭한 소리가 났다.
주인장이 돌아서며 덧붙였다.
“술이랑 잘 맞수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내가 한 점 집어 입에 넣었다. 짭짤한 맛이 먼저 퍼지고, 뒤이어 고소함이 남았다. 고소리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입 안에서 맛이 천천히 섞였다. 몸이 아주 조금 느슨해졌다. 어깨에 들어가 있던 힘이 풀렸다.
나는 등을 의자에 기대고 숨을 내쉬었다.
바깥에서는 바람이 골목을 지나가고 있었다. 문틈으로 들어온 소리가 테이블 아래까지 스며들었다. 따뜻한 음식과 고소한 술로 몸이 기분좋게 데워졌다.
잔을 내려놓고, 다시 한 점을 집었다. 생각은 그보다 조금 늦게 따라왔다.
드르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밖에서 바람이 골목을 긁고 지나가는 소리가 열린 문틈으로 새어들었다. 문이 닫히면서 소리는 이내 줄어들었다.
옆자리에서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젖은 옷자락이 스치는 냄새도 잠시 지나갔다.
“라디오 좀 켜도 되쿠과?”
주인장이 물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이얼을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지직─ 잠깐의 잡음 뒤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날씨 이야기였다. 바람이 강해질 거라는 말, 해상 쪽은 주의하라는 말. 말끝이 길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접시에 시선을 두고 자리돔 한 점을 집었다. 껍질 쪽이 먼저 이빨에 닿았다. 바스락 소리가 났다. 곧이어 짠맛이 퍼졌다. 혀 안 쪽이 저절로 오그라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해안도로 옆, 차를 세워두고 문을 열었을 때 얼굴로 들이치던 바람. 손에 들려 있던 종이봉투가 파닥거리던 감촉. 말 한마디 없이 웃기만 하던 얼굴.
나는 바로 고소리 술을 들었다. 한 모금.
목을 타고 내려가며 알코올보다 먼저 곡물 향이 올라왔다. 그 냄새에 기억은 더 붙잡히지 못하고, 툭─ 떨어졌다.
라디오에서는 파도 이야기가 계속 흘렀다. 그 위로 옆자리 손님이 소주병을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유리끼리 부딪히는, 둔한 소리는 청량했다.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이번엔 천천히 씹었다. 술잔을 내려놓고, 접시 가장자리에 묻은 기름을 눈으로 따라갔다. 불빛에 고소한 흔적이 반짝거렸다.
주인장이 주방 쪽에서 나오며 말했다.
“비는 밤새 오다 말다 할 거우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누구에게 한 말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잔을 다시 들었다. 이번엔 조금 덜 마셨다.
코 끝을 스치는 곡물향에 마음이 불렀다.
이 정도면, 괜찮았다.
잔을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바람은 여전히 골목을 지나가고 있었고, 라디오는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확실해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오늘 밤은 이 정도면 됐다.
이 정도면,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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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n is listeni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