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ings / novels
[ 눈이 예뻐 ]
❄❄❄
환은 느린 사람이었다.
늘 한 박자 늦게 움직이고 늦게 말했다.
그런 그를 어떤 이는 신중하다 표현했고 어떤 이는 답답해했다.
어떤 결정을 내리거나 질문을 받을 때도 그는 꼭 한 번 더 생각했다.
생각이 많아서도 상대방을 배려해서도 아니었다.
단지─
이걸 선택했는데 잠시 후에 더 좋은 게 나타날 수 있으니까.
라는 생각이 늘 발목을 잡았다.
그런 우유부단함이 스스로도 힘들지만 태생이 그랬다.
점점 성장할수록 그는 자연스레 남들보다 조금 늦게 움직이는 법을 배웠다.
늦게 말하고,
늦게 결정하고,
대개는 마음을 정리하지 않은 채 넘겼다.
경험상 그 선택은 대체로 틀리지 않았다.
먼저 나서지 않았기에
실패의 책임도, 후회의 무게도
대개는 그를 비켜갔다.
설아를 처음 봤을 때, 환은 그 장면을 오래 기억하게 될 줄 몰랐다.
그녀는 특별히 눈에 띄는 타입은 아니었다.
말수가 많지도 않았고, 사람들 사이에 중심이 되는 쪽은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그녀는 늘 마지막에 남아 있었다.
회의가 끝난 뒤에도,
학과행사가 끝난 뒤에도,
모두가 하나둘 자리를 뜨는데 그녀만은 서둘러 일어나지 않았다.
마지막에 남은 누군가 정리를 마칠 때까지 가만히 가방을 들고 서서 그 시간을 함께 견뎠다.
그 장면을 본 순간, 환은 이유 없이 마음이 풀렸다.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사람.
지금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말로 하지 않아도 알려주는 사람.
그 감정은 호감이라기보다는 안도에 가까웠다.
그녀 앞에서는 굳이 잘 보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고,
무엇이든 조금 미뤄두어도 괜찮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 뒤로도 환은 그녀와 자주 마주쳤다.
둘만 남은 순간도 몇번이나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입술 끝에 속마음을 감추고 침묵으로 그녀를 대했다.
말을 꺼낸 뒤의 장면이 머릿속에 선명했다.
말주변이 없는 탓에 어색하게 몇마디 이어지다 끊어질 것이다.
그 이후에 남을 공기.
그 어색함과 멋쩍음을 환은 견뎌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말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그게 그가 배운 제일 안전한 방법이었다.
그날 이후로 환은 설아를 조금 더 오래 보게 되었다.
멀찍이,
아주 안전한 거리에서.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굳이 말을 섞지 않아도 되는 위치.
필요해 보일 때만 아주 조금 움직이면 되는 자리.
그는 그 자리에 만족했다.
굳이 말을 걸지도 다가가지도 않았다.
다만,
설아가 그 자리에 없을 때는
자신이 어디쯤에 서 있는지 가늠이 잘 되지 않았다.
대신 설아가 곤란해 보이는 순간을 찾고,
도움이 필요한지 살피고,
필요하면 기꺼이 손을 보탰다.
그때의 그는 몰랐다.
움직이지 않아도 마음은 자란다는 걸.
아니, 알고 싶지 않았다가 정확한 표현이었다.
어느 순간 더이상 설아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변하지 않았다.
그저 감정을 인정하되, 그 감정을 ‘좋아함’이라고 정의하지 않았다.
그건 너무 빠르고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단어였다.
환은 끊임없이 자신의 감정이 ‘좋아함’이 아니라는 이유를 확인하려 했다.
나랑 결이 같으니까. 나처럼 느린 사람들과도 호흡이 맞으니까.
끊임없이 확인한 이유들은 오히려 그녀에 대해 오래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
그녀 앞에선 늘 서두르지 않는 사람이 되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느 날 설아가 프린터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용지가 걸렸는지 멈춰버린 프린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환은 그 모습을 보고 잠시 기다렸다.
그녀가 도움이 필요한지 판단하기 위해.
잠시 후, 그녀는 주변을 살피며 도움 청한 사람을 찾았다.
순간─ 눈이 맞았다.
그제서야 환은 조용히 다가갔다.
프린터를 열고 걸린 용지를 빼자
그녀의 얼굴에 잠시 빛이 스쳤다 사라졌다.
“됐어요?”
“응”
그게 전부였다.
고맙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굳이 오가지 않았다.
누군가를 도와주고도 아무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
그 적당한 거리감이 그는 좋았다.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의지하거나,
자신을 특별히 고맙게 생각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조용히 남아 있는 사람.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멀지 않은 곳에 있을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아주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설아가 그에게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아주 작고 조용하지만, 분명 환을 향한 인사를.
처음에는 다른 사람에게 하는 인사를 우연히 들은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늘 그랬듯이, 그는 '먼저 나서지 않는 쪽'을 택했으니까.
대답하지 않고, 못 들은 척, 자연스럽게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마주칠 때마다,
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조차,
그녀는 여전히 그에게 작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숙였다.
마치 아주 오래된 친구에게 그러하듯이.
환은 그 인사가 곤혹스러웠다.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거리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는 침묵과 거리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고 있다고 믿었는데,
그녀의 그 작은 행동이 그의 믿음을 흔들었다.
인사를 받으면 '관계'가 시작될 것 같았다.
관계는 곧 책임과 기대를 의미했고,
그는 아직 그런 것들을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모른 척했다.
그것이 그가 그녀를 대하는 가장 안전한 방식이었다.
늦게,
그리고 느리게.
그의 방식대로.
그의 일관된 행동에 적당한 거리감은 금새 돌아왔다.
그날은 유독 외투 단추를 끝까지 채운 채로
캠퍼스를 빠져나왔다.
겨울이 되었다.
환이 설아를 만나고 사계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 사이 변한 것은 없었다.
설아는 그를 마주치면 슬쩍 눈인사를 건냈다.
그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설아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면 그는 한박자 기다렸다.
도움을 요청하면 그는 움직였다.
2학기 기말고사가 끝나는 날이었다.
방학 전 마지막으로 그녀를 볼 수 있는 날.
환은 수업이 없음에도 학교에 나갔다.
그리고 눈이 내렸다.
갑작스러운 눈에 캠퍼스는 온통 새하얗게 물들었다.
환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눈 때문에 들뜬 풍경들.
그 모습은 설아의 옅은 미소를 닮았다.
환은 동아리실을 지나면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카톡을 연 환은 친구목록에서 설아의 프로필을 찾았다.
상태 메시지에 "눈이 예뻐" 라고 쓰여 있었다.
환은 본능적으로 그 상태메세지가 누군가를 향한 말임을 알았다.
눈은 계속 내렸고 상태 메시지는 변함이 없었다.
환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손을 쥐었다 폈다.
손끝에 작은 상자가 걸렸다.
환은 상자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파란색 바탕에 빨간 리본이 달려있었다.
설아를 생각하며 샀던 목걸이였다.
줄 수 있을 거라 생각치는 않았다.
다만─
환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회양목으로 전정된 생울타리 위에 눈이 고르게 쌓여 있었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는 표면.
환은 손에 쥔 상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그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두었다.

눈 위에 올려진 상자는
금방이라도 묻힐 것처럼 가벼워 보였다.
혹시라도 설아가 이 길을 지나며
우연히 발견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굳이 끝까지 붙잡지는 않았다.
환은 걸음을 돌렸다.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주머니에 넣었던 손이 헛돌았다.
그는 한 번 더 멈췄다가,
이번에는 돌아보지 않고 캠퍼스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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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n is listeni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