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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은 늘 교실에서 먼저 시작됐다 ]
겨울은 늘 교실에서 먼저 시작됐다. 창문에 맺힌 김과, 쉬는 시간마다 들려오는 난로 소리.
나는 교과서를 넘기다 말고 창밖을 보았다. 운동장에 쌓인 눈 위로 발자국들이 어지럽게 겹쳐 있었다. 아침부터 흐리던 하늘에서, 결국 눈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괜히 손끝이 시려와 어깨를 움츠린 나는 의자 등받이에 걸어둔 가디건을 들어 걸쳤다.
지금은 2교시 문학 시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목이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집중이 되지 않았다. 칠판에 고전가사에 대해 필기하며 설명하는 선생님의 목소리는 한쪽 귀로 흘려보내면서도, 나는 습관처럼 칠판의 내용을 교과서 한켠에 옮겨 적었다.
다른 사람들이 봤다면 지금 내 모습은 영락없이 수업을 열심히 듣는 모범생일 것이다.
모범생인 척하는 것은 쉽다. 수업에 집중이 안 되더라도 지금처럼 교과서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필기를 열심히 하면 된다.
수업 종료 종이 울렸다. 수업 자료를 챙겨 나가시는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교과서를 정리한 나는 교실 뒷편 사물함으로 향했다.
사물함으로 향하던 내 시선이 자연스레 그 애에게 걸렸다. 반듯한 자세로 앉아서 소설을 읽고 있었다.
그 애 자리는 창가 쪽이었다. 앞줄도 뒷줄도 아닌 중간 자리.
선생님이 출석을 부를 때면 한 박자 늦게 “네” 하고 대답하는 아이. 이름을 들으면 얼굴이 떠오르는데, 얼굴을 보면 이름이 바로 나오지 않는 아이. 성적표에서도 늘 가운데쯤 하는 아이.
이상하게도 나는 그 애가 교실에 있는지 없는지부터 확인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 애는 늘 조용히 자기 자리에 앉아 책을 읽거나 엎드려 있었다. 귀에는 언제나 검은색 이어폰이 꽂혀 있었다.
말을 섞는 애는 거의 없었다.
나는 그 애가 궁금했다.
읽고 있는 책이 어떤 책인지, 항상 귀에 꽂혀 있는 이어폰에선 어떤 음악이 나오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하지만 나는 그 애한테 다가가지 않았다.
─────
유난히 수업이 길게 느껴지는 날이 있었다. 꼭 무슨 일이 있는 날도 아닌데, 종이 좀처럼 울리지 않는 그런 날.
나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교실 안이 웅성거릴수록 바깥은 더 조용해 보였다. 눈은 아침보다 조금 더 굵어져 있었다. 흩날린다기보다는 쌓일 준비를 하는 것처럼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문학 시간은 원래 지루하지 않은 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교실을 떠돌다 내 옆을 스쳐 지나갔고, 칠판의 글씨들은 차례대로 적히다가 어느 순간부터 의미를 잃었다.
나는 공책에 아무 말이나 적었다가 지웠다. 지워도 얕게 적혔던 흔적이 남았다. 생각보다 힘을 눌러 쓴 모양이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계속 힘을 줘 지우다 보니 그 부분만 울었다.
‘쯧.’
속으로 혀를 차며 결국 지우개를 내려놓고 해당 장을 조심스럽게 찢었다. 동시에 종이 울렸다.
쉬는 시간이 되자 교실 안이 한꺼번에 살아났다. 의자가 끌리는 소리, 웃음소리,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소란스러움이 귀에 들어오기 전에 나는 이어폰을 꽂았다. 책상 서랍에서 아까 읽던 소설책을 꺼냈다.
카프카의 『변신』. 학교 도서관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고른 책이었다. 벌레가 된 가장의 이야기.
작가의 의도나 평가는 관심 없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읽어도 다음 장으로는 넘어갔다. 주인공이 왜 벌레가 됐는지도, 왜 가만히 있는지도 딱히 궁금하지 않았다.
나에게 독서는 혼자 있기 위한 수단에 가까웠다.
어릴 때부터 혼자인 게 좋았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걸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다만 책을 읽고 있을 때만큼은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고, 아무도 나를 데려가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책을 읽었다. 책을 통해 세상을 배운다거나 생각이 깊어졌다거나 하는 이유는 없었다. 그런 건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책은 그저 나를 가만히 두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더니 그럭저럭 버티니 그래도 시간은 가는 모양이다. 4교시 수업 종료 종이 울렸다.
동시에 일사분란하게 나갈 준비를 하는 애들이 보였다. 점심시간이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애들은 늘 같이 움직였다. 누가 누구랑 먹을지, 어디에 앉을지. 그런 걸 정하는 데에 왜 그렇게 많은 말을 써야 하는지 나는 잘 몰랐다.
나는 혼자 먹는 게 편했다. 급식 줄에서도, 자리에 앉아서도. 옆에 누가 없어도 불편하지 않았다.
혼자 있으면 생각이 많아지긴 했다. 그렇다고 꼭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
학교생활이 뭘 위한 건지 가끔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업을 듣고, 시험을 보고, 성적표를 받고. 그걸 몇 년 더 반복하면 졸업이고 그 다음은 또 다른 어딘가일 텐데.
다들 그걸 너무 잘 아는 것처럼 보였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뭘 하고 싶은지도.
나는 그런 게 없었다. 다만 빨리 졸업하고 싶다는 생각만 있었다. 학교가 싫다기보다는 여기에 오래 머물 이유를 아직 찾지 못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나는 눈에 띄지 않게 지내는 쪽을 택했다. 어른들이 정해놓은 선을 넘을 생각도 없었고 굳이 벗어날 이유도 없었다.
그게 제일 간단했으니까.
눈이 더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창문에 닿은 눈송이가 천천히 녹아내렸다.
나는 그걸 보다가 고개를 들어 교실 안을 한 번 훑었다. 기분 탓인지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시선에 걸리는 건 없었다.
뭐, 착각인가 보다.
─────
급식실은 늘 시끄러웠다.
사람이 많아서라기보다는 다들 혼자 있기 싫어 보여서 더 그랬다. 나는 친구들 사이에 앉아 있었다. 웃고, 대답하고, 숟가락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익숙하기 그지없는 점심시간은 그렇게 늘 그렇듯 별일 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친구들은 성적을 주제로 이야기 중이었다. 나는 적당히 친구들 대화에 반응하며 밥을 먹는 척 시선을 옆쪽으로 흘렸다.
급식실 한쪽 끝.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은 자리. 늘 그렇듯 혼자 앉아 있는 애가 있었다.
그 애였다.
교실에서는 잘 안 보이던 표정이 여기서는 이상하게 또렷했다. 그 애는 여전히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고개를 조금 숙이고 말없이 밥을 먹고 있었다.
나는 그 애를 보고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괜히 다른 얘기에 더 크게 웃었다. 어느새 애들 주제는 시험, 성적에서 연예인으로 넘어갔다.
그 애는 여전히 혼자였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지도 않았고, 누군가를 피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냥─ 거기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애는 그때 일을 나처럼 기억할까.
괜히 시선을 오래 두고 있었나 보다. 그 애가 고개를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고개를 든 순간 시선이 나와 겹쳤다. 아주 잠깐. 정말 잠깐이었다.
나는 먼저 눈을 피했다. 괜히 들킨 기분이 들어서.
하지만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괜히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이미 비어 있는 컵이었다. 시선을 둘 곳이 없어 식판만 내려다봤다. 김이 빠진 국 위로 조용히 기름막이 흔들렸다.
다시 고개를 들면 또 눈이 마주칠 것 같아서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
밥을 먹고 있었다. 늘 그렇듯 혼자. 급식실은 시끄러웠고 나는 그 소리에서 최대한 멀어지려 자리를 고른 것뿐이었다.
반찬을 하나 집으려다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었다. 딱 그 정도였다. 이유도, 맥락도 없이 그냥 시선이 느껴져서.
창가 쪽 테이블은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자리로 오늘도 역시 사람들로 붐볐다. 해당 자리의 주멤버인 아이들이 꺄르륵 거리는데 그들 중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같은 반 애였다. 이름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항상 사람들 사이에 있는 애. 성적이 좋다는 얘기를 누군가에게서 들은 적도 있었다.
그 애는 내 시선을 확인하자마자 먼저 고개를 돌렸다. 나는 잠깐 더 보고 있다가 다시 식판으로 시선을 내렸다.
별일은 아니었다.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밥을 먹는 동안 계속 시선이 느껴졌다.
허나 그냥 무시했다. 왜 보고 있었는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해봤자 달라질 건 없으니까.
나는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혼자 먹는 점심은 여전히 편했다.
다만, 평소보다 먹는 속도가 느려졌다.
─────
종례가 끝나고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복도를 내려오다 그 애와 마주쳤다. 우리는 잠깐 서로를 바라보다 아무 말 없이 지나쳤다. 그 순간 가슴이 이상하게 조여 왔다. 마치 인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러기엔 너무 늦어버린 사람처럼.
학교를 나서는데 뒤에서 누군가 불렀다.
“저기.”
돌아보니 그 애였다. 손에 작은 휴지가 쥐어져 있었다.
“눈 와서… 미끄러워.”
그 말뿐이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나란히 걸었다. 말은 거의 없었지만 눈이 소리를 다 삼켜줬다.
눈 밟는 소리만 작게 이어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그 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발걸음이 몇 번쯤 어긋났다가 다시 맞춰졌다. 누가 속도를 조절한 것도 아닌데 그랬다.
골목으로 접어들자 바람이 조금 잠잠해졌다. 대신 눈이 더 또렷하게 보였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떨어지는 눈송이들이 느리게 흔들렸다. 나는 이유 없이 그 장면을 오래 바라봤다. 마치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보지 못할 것처럼.
그 애가 잠깐 멈춰 서서 운동화 바닥을 털었다. 눈이 얇게 들러붙어 있었다. 몇 번 발을 털어낸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걸었다. 그 작은 동작이 괜히 눈에 남았다.
나는 그 애보다 반 걸음쯤 뒤에서 걸었다. 나란히 걷고 있으면서도 완전히 같은 선 위에 서지는 않은 거리.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기도 하고 그대로 두면 영영 닿지 않을 것 같기도 한 애매한 간격이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차가운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이 또렷해지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말없이 걸었지만 이상하게 혼자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말이 없어도 어색하지 않은 순간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문득, 우리가 이렇게 함께 걷는 일은 앞으로도 거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될 것 같았다. 어떤 순간들은 애써 붙잡지 않아도 스스로 한 번뿐이라는 걸 알고 지나간다.
그 애는 여전히 그때와 같았다.
아무것도 크게 만들지 않는 사람. 그래서 오히려 오래 남는 사람.
눈 냄새가 났다. 이유 없이 오래된 겨울이 떠올랐다.
─────
어릴 때도 겨울이었다. 초등학교 운동장 옆, 낡은 놀이터. 그날 나는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미끄럼틀 아래에 쭈그려 앉아 울고 있었다. 아빠는 이미 없었고 엄마는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한다고 했다. 아무도 내 말을 묻지 않았고 나는 그게 너무 억울했다.
그때 누군가 내 앞에 섰다.
“이거.”
고개를 들었을 때 그 애가 있었다. 같은 반이었고 말도 거의 섞어본 적 없던 남자아이. 그는 손수건을 내밀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손수건을 받아 들고 한참을 울었다. 그 애는 옆에 앉아서 내 이야기를 다 들어줬다. 중간에 끼어들지도, 해결책을 말하지도 않았다.
“울어도 돼.”
그 말 하나가 전부였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냈다. 같은 학교, 같은 반이 되었지만 인사를 나누지도 않았다. 그는 다른 애들처럼 자라 있었고 나는 반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가끔 생각했다. 그 애는 나를 기억할까.
─────
집 앞에서 헤어지기 직전, 나는 말했다.
“너… 초등학교 때 기억나?”
그 애는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는데.”
나는 그 대답이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아, 그냥.”
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이 조용히 쌓이는 소리만 들렸다.
그 애는 장갑을 끼지 않은 손으로 숨을 불어넣고 있었다. 금세 하얗게 번졌다가 사라지는 입김을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같은 숨을 내쉬었다.
왜인지 묻고 싶었다. 정말 기억나지 않는 건지, 아니면 기억하면서도 말하지 않는 건지.
하지만 묻지 않았다. 어떤 기억은 확인하는 순간 지금과는 다른 모양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다. 그날처럼, 조용히. 이번엔 내가 울지 않는데도 겨울은 똑같이 차가웠다. 하지만 손에 남은 온기는 그때보다 조금 더 오래 갔다.
그 대화를 끝으로 그 애가 돌아섰다. 나도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몇 걸음 떨어지자 발자국 소리가 갈라졌다. 같은 눈 위에 남았는데도 방향은 달랐다.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돌아보지 않아도 그 애가 아직 거기에 서 있을 것만 같았다.
그 겨울은 이미 끝났지만, 이상하게 오래 남아 있었다.
겨울은 늘 교실에서 먼저 시작됐다.
그리고 어떤 겨울은─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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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n is listeni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