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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죽는다면 태양을 볼래 ]
지하에는 낮도 밤도 없었다. 언더월드라 명명된 이 세상에서 시간은 조명 점검표와 배급표에 따라 흘렀다.
누군가는 등불을 ‘빛’이라 불렀다. 젠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아는 빛은 그뿐이었다.
벽을 따라 달린 희미한 전구, 가게 앞에서 깜빡이는 간판의 잔광, 가끔씩 아침을 대신하듯 켜졌다 꺼지는 공공 조명.
젠은 그 빛들이 전부 누군가의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불빛은 배급처럼 켜졌다가 꺼졌고, 켜진 곳으로만 사람들이 몰렸다.
29번가의 복도는 늘 축축했다. 퀘퀘한 곰팡이 냄새와 쇠비린내가 퍼져서, 숨을 쉴 때마다 입안에 비릿함이 남았다. 29번가에는 모두 열다섯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젠은 그중 두 번째 집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서 첫 울음을 터트릴 때 맡았던 그 비릿함을 젠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젠은 늘 숨을 들이쉴 때마다 어깨를 조금 올렸다가 내렸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작은 동작이었다.
언더월드는 1층부터 35층까지였다. 사람이 사는 곳은 1층부터 30층까지. 숫자가 작아질수록 벽이 깨끗해지고, 공기가 덜 썩었고, 사람들의 눈이 더 말라 있었다.
젠이 사는 29번가는 29층이었다. 29층 아래 30층에는 일을 할 수 없는데 부양할 가족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다.
젠은 처음 30층으로 내려갔던 날을 잊지 못한다. 그곳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29층보다 더 약한 불빛 아래 깡마른 사람들이 눈만 깜박인 채 복도 여기저기 앉거나 누워 있었다. 젠은 그 비릿하고 썩은 냄새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뒷걸음질 쳤다. 그날 이후로 젠은 29번가의 냄새가 덜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덜 비리다고. 덜 썩었다고.
31층부터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 대신 살아남기 위한 시설들이 눌어붙듯 자리 잡고 있었다. 35층에는 하수와 쓰레기가 모였다. 34층에는 곡식이, 33층에는 가축이 있었다. 32층에는 여과된 물탱크가, 31층에는 전기와 생활용품을 만드는 시설이 있었다. 29번가의 냄새는, 그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냄새였다.
젠의 엄마와 아빠는 하루 종일 1번가로 출근했다. 젠은 그 말이 아직도 이상했다. 출근. 어딘가로 올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1번가는 실제로 위쪽에 있었다. 젠 역시 부모님을 따라 1번가로 올라갔다. 어머니는 그 집의 가정부였고, 아버지는 집사로 일을 했다. 젠은 그 집 아이의 놀이상대였다.
부모님이 일하시는 집은 1번가에서도 눈에 띄었다. 문이 두 겹이었고, 문지방이 높았다. 젠은 그 문지방을 넘을 때마다 발끝을 조심했다. 자기 몸이 그 집의 규칙을 흙으로 더럽힐까 봐.
칼은 그 집의 아이였다. 젠과 같은 나이, 같은 눈동자 색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떤 것들은 전혀 달랐다.
칼은 자기 방에 혼자 있으면 늘 심심하다고 말하곤 했다. 젠은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한 번도 배워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젠은 항상 무언가를 했기 때문이다. 배급 시간에는 배급을 받으러 복도 끝에 부모님과 함께 줄을 서야 했고, 밤에 잘 때도 부모님과 함께 딱 붙어서 자야 했다.
칼처럼 혼자만의 방을 가질 수 있다는 것조차 칼을 보고 처음 알았던 젠은, 가끔 칼이 같이 자자며 자기를 붙잡을 때면 귀찮은 척했다. 하지만 내심, 매번 자기를 붙잡아주길 바랐다. 칼의 손이 젠의 손목을 잡으면, 젠은 그 온도를 잠깐 훔쳐오는 기분이 들었다.
칼은 젠을 놀이상대로 불렀다. 가끔은 친구라고도 불렀다. 둘 중 무엇이 더 진심인지 젠은 잘 몰랐다. 칼의 말은 늘 반짝였다. 그 반짝임이 젠에게는 등불처럼 느껴졌다.
가까이 가면 따뜻해질 것 같지만, 너무 가까이 가면 태울 것 같은.
그날도 평소와 변함없는 날이었다. 아니 평소보다 조금 좋은 날이었다. 아침 배식은 야채를 대충 넣어 끓인 토마토 스프였다.
배식을 기다리는 줄을 서며 젠은 잔뜩 신이 났다. 시큼한 토마토 냄새가 복도를 꽉 채우고 있었다. 젠은 발 뒤꿈치를 들고 슬쩍 앞을 바라봤다. 큰 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평소에는 건더기 하나 없는 희멀건 스프가 나오지만, 한달에 두세 번쯤 이렇게 건더기가 떠 있는 날이 있었다. 숟가락을 휘저을 때마다 잘게 썬 야채가 물결처럼 떠오르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러자 배에서 꼬로록 소리가 났다.
줄 앞에 선 아이 하나가 그 소리를 들었는지 뒤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쳤다. 젠과 아이는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아침 배식이 끝나고 차가운 물로 세수와 양치를 마친 젠은 부모님을 따라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부모님은 고개를 숙이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젠은 혼자 복도에서 기다렸다. 칼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젠은 기다림이 익숙했다. 가끔 칼은 준비가 덜 됐거나 늦잠을 잤거나 부모님과 시간을 보낸다는 이유로 젠을 복도에서 세워두곤 했다.
드디어 칼이 일어나 준비를 마쳤다는 아버지의 말에 젠은 가만히 서 있느라 굳은 무릎을 주먹으로 콩콩 풀고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 칼의 방으로 향했다.
칼의 방은 늘 따뜻했고, 바닥은 젠의 신발을 미끄럽게 할 만큼 매끄러웠다. 습관처럼 발뒷꿈치를 살짝 들고 문지방을 넘었다. 신발 바닥이 스치듯 문지방에 닿는 소리가 들렸다. 젠은 순간 다리에 힘을 주고 발 아래를 내려다 봤다. 다행히 먼지나 흙이 떨어지지 않았다.
방안으로 들어온 젠은 책상에 앉아 있는 칼을 봤다.
“나 왔어, 칼.”
젠의 인사에 칼이 슬쩍 시선을 돌려 그를 한번 바라봤다. 그리고는 다시 책상 위에 놓인 커다란 상자 꾸러미로 고개를 떨궜다. 두 손은 낑낑거리며 포장지를 뜯어내고 있었다.
금속이 번쩍거렸다. 안에는 헬멧과 조끼, 팔과 다리에 두르는 것 같은 장치가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젠은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그거 뭐야?”
젠의 물음에 칼은 어깨를 으쓱했다. 자랑하고 싶은데 티를 내고 싶지 않은 척할 때 나오는 어깨였다.
“방호복이야.”
방호복. 어쩐지 그 단어의 울림이 마음 한구석을 흔들었다. 젠은 낮게 혀 안쪽에서 세글자를 연달아 불러보았다. 희미하게 뽀송뽀송한 냄새가 났다.
젠은 ‘방호’라는 말을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지상으로 나갈 때 필요한 것. 30층에 사는 사람이 유일하게 30층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방호복을 입고 지상으로 나갔다 오는 일이라고 어른들끼리 하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어른들이 그 단어를 언급할 때면 29층 아이들은 다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어른들의 대화를 훔쳐 듣곤 했다. 하지만 어른들은 아이들이 훔쳐 듣는 기색이라도 보이면 그 즉시 입을 다물었다.
“너… 지상 올라가 봤어?”
젠의 물음에 칼이 잠시 멈칫했다. 그 짧은 멈춤은 대답보다 더 많은 걸 말했다.
“아니.”
칼이 말했다.
“이거 입으면 지상 갈 수 있어?” “글쎄… 방호복이니까 갈 수 있지 않을까?”
젠은 칼의 애매한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칼은 젠보다 아는 게 많았다. 그러니 칼의 말은 믿을만 할 것이다.
“왜? 너 지상 올라가 보고 싶어?” “아니.. 그냥…”
칼의 질문에 젠은 말끝을 흐렸다.
“예전에 니가 보여준 거 있잖아.” “예전에?” “태… 태 뭐랬는데… 지상에 있는 빛.” “아, 태양?” “아, 응.”
젠의 눈에 생기가 어렸다. 젠은 언젠가 칼이 보여준 책에서 본 태양 사진을 떠올렸다. 그 사진을 처음 봤을 때 젠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젠은 눈이 부시다는 말이 어떤 느낌인지 처음 알았다.
어른 손바닥만한 크기의 사진 가운데에 하얗게 번진 빛이 있었다. 그 주변은 생전 처음 보는 색상이 보였다. 칼은 그 색을 하늘색, 파란색이라고 했다.
하늘색. 젠은 본 적이 없는 색이었다. 그 가운데 하얗게 번진 태양빛은 아름다웠다. 옅은 노란빛이 섞인 것 같기도 했다. 등불보다 훨씬 환하고 따뜻해 보였다.
“태양을… 보고 싶어.”
망설이듯 내뱉은 젠의 말에 칼은 가만히 젠을 봤다. 방호복을 바라보는 젠의 볼이 평소보다 상기되어 있었다. 젠에게는 방호복이 아주 대단한 물건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칼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뜸을 들이듯 숨을 한 번 삼켰다.
“...빌려줄까?”
칼의 말에 젠의 눈이 커졌다.
“진짜?” “...응.”
젠은 칼의 말에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콩콩 뛰다가 얼른 발밑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조금 전보다 조금 약한 강도로 다시 한번 뛰었다.
칼은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젠.” “응?”
칼의 부름에 젠이 흥분을 숨기지 못한 채 상기된 목소리로 답했다.
“대신 조건 있어.”
칼은 흥분한 젠을 바라보며 손가락 하나를 폈다.
“무슨 조건?” “세상에 공짜는 없대. 우리 아빠가 그랬어.”
그리곤 활짝 웃었다.
“내 소원 열세 개 들어줘. 그럼 빌려줄게.” “좋아!”
젠은 흔쾌히 조건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칼의 소원은 거기서 거기였다. 칼의 놀이상대로 지내며 웬만한 장난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아, 맞다. 너 가더라도 입구까지만 갔다 와. 들키면 나도 혼나.” “알았어. 소원이나 말해.”
그날 이후 젠은 일주일 동안 열세 번의 소원을 치렀다.
처음엔 정말 사소했다.
젠이 먼저 술래하기. 칼의 장난감 정리하기. 칼이 이겼다고 말해주기.
젠은 쉽게 그 소원들을 해결했다.
칼은 젠이 소원을 치룰 때마다 웃었다. 그때마다 젠도 따라 웃었다. 칼이 웃어야 칼이 약속을 지킬 것 같았다.
네번째 소원부터는 조금 수고가 필요했다.
칼의 숙제해주기.
젠은 글을 잘 읽지 못했다. 그래서 처음으로 다른 소원으로 바꾸면 안 되냐고 애원했다. 칼은 웃으며 안 된다고 했다. 젠은 어쩔 수 없이 되는대로 숙제를 끝냈고 칼은 젠이 한 숙제를 고쳐 쓰면서 말했다.
“젠, 이것도 틀리면 어떻게 해.”
젠은 칼의 설명을 한귀로 흘리면서 멋쩍은 웃음만 지었다.
열번째쯤 되었을 때, 칼은 젠의 아침 배급식사를 먹지 말고 달라고 했다. 그 소원을 듣는 순간부터 젠은 배가 꼬로록 거리는 것 같았다. 잠시 망설여졌다. 하지만 젠은 고개를 끄덕였고 다음날 아침 배급시간에 받은 식사를 먹지 않고 조심스럽게 보관통에 담아 칼에게 가져다 줬다.
칼은 젠이 내민 보관통에 담긴 음식을 한 숟가락 먹고는 맛없다면서 그냥 젠에게 먹으라고 줬다. 젠은 칼이 남긴 보관통을 순식간에 비웠다. 젠은 속으로 안도했다.
‘맛없다고 해서 다행이다.’
칼은 책상 서랍에서 초코렛을 꺼내 입에 물며 허겁지겁 먹는 젠을 바라봤다.
그 후로도 몇 가지 소원이 더 있었다.
젠은 그 소원들을 하나씩 처리했다. 그리고 마지막 날이 왔다.
열세번째 소원을 말하라는 젠에게 칼은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상자를 열자 작은 카메라가 보였다.
“이건… 카메라잖아.” “응, 맞아.” “이걸 왜 줘?” “사진 찍으라고.” “사진?” “응. 사진. 태양 사진 한 장 찍어서 가져다 줘.” “한 장이면 돼?”
젠의 되물음에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카메라 사용법을 알려줬다.
“이 부분을 한번 누르면 켜지면서 빨간 불이 들어와. 빨간 불이 파란불로 바뀌면 위에 이 버튼 누르면 돼.”
젠은 칼의 설명을 집중해서 들었다. 그러면서도 칼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굉장히 어려울 거라 생각했던 마지막 소원은 의외로 너무나 쉬웠다.
“진짜 이거면 돼?” “응. 말로 하면 다 거짓말 같잖아. 근데 사진이면… 나도 보고 믿을 수 있잖아. 니가 진짜 태양을 본 거.”
태양을 본 거. 그 말이 부드럽게 젠의 가슴을 찔렀다.
“응!”
젠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칼이 내미는 방호복 상자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젠의 엄마가 그 상자를 보고 물었다.
“그건 뭐니?” “칼이 준 거야.”
칼이 준 거라는 말에 그녀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잃어버리지만 마렴.” “응.”
그게 전부였다.
그날 저녁, 부모님이 공용 샤워실로 샤워하러 간 사이 젠은 몰래 상자에서 헬멧을 꺼내 써봤다. 젠은 엄마가 쓰는 반쯤 금이 간 화장대 거울 앞에 섰다.
젠의 몸보다 커보이는 헬멧이었다. 테두리의 금색 장식이 어두운 거울 속에서 유난히 반짝거렸다.
괜히 으쓱해져 거울 앞에서 멋있어 보이는 자세를 취하던 젠은 이내 멋적게 웃었다. 그리고 헬멧을 벗어 다시 상자 안에 넣었다.
다음날 아침, 언더월드의 조명이 커졌다. 평소와 달리 조명이 커지기도 전에 일어난 젠은 눈을 뜨자마자 공용 샤워실로 향했다. 서둘러 씻고 돌아온 젠은 아침 배급 종이 울리기도 전에 배급 줄 섰다.
그날 젠은 1번이었다.
배급받은 식사를 단숨에 마친 젠은 곧바로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늘은 칼이 쉬어도 좋다고 했다는 말을 부모님께 전했다.
출근준비를 하던 부모님은 별다른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부모님의 뒷모습이 복도 끝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배웅한 젠은 잰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현관 앞에 미리 챙겨둔 방호복이 든 상자와 카메라가 든 상자를 챙겨 들고 다시 집을 나섰다.
지상에서 지하로 층층이 내려오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숫자가 바뀌는 구간이 있다. 그곳이 언더월드와 지상을 나누는 입구였다.
1층 복도 끝을 지나 입구로 가려면 계단을 쉰 개나 올라야 했다.
젠은 상자를 들고 낑낑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마지막 계단을 올라섰을 때, 입구 문이 보였다.
젠은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숨이 찼다. 혹시 누군가에게 들킬까 조심하느라 평소보다 훨씬 느린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왔기 때문이다.
잠시 숨을 돌린 젠은 상자를 열었다. 방호복을 꺼내 하나하나 몸에 맞게 벨트를 조절했다.
그리고 입구 손잡이를 잡았다. 잠깐 망설이다 이내 손잡이를 돌렸다.
쿠구구구─ 묵직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이 완전히 열리자 눈부신 빛이 쏟아졌다. 젠은 반사적으로 눈을 찡그렸다.
처음 보는 색이었다.
눈을 조금씩 뜨자 황갈색 땅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하늘이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먼지가 뿌옇게 흩날렸다. 젠은 저도 모르게 기침을 하며 숨을 들이쉬었다. 헬멧 안에서 공기가 순환하는 소리가 들렸다. 29층 복도 벽을 우웅 울리는 환기구 소리와 비슷했다. 익숙한 소리에 젠은 순간 안심했다.
마른 흙이 햇빛에 데워진 노릇한 냄새가 희미하게 코끝을 맴돌았다.
그때 헬멧 앞 유리 왼쪽 하단이 붉게 깜박였다.
13:00
젠은 글자는 모르지만 숫자는 잘 알았다. 사는데 별 도움이 안 되는 글자와 달리 숫자는 늘 생존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젠은 그 숫자가 마음에 들었다.
젠은 한걸음 내딛었다.
푸욱─
생각보다 푹신한 소리와 함께 바닥이 닿았다. 약간의 탄력이 느껴졌다. 한 걸음 더 내딛었다. 이번에도 방금 전보다 조금 덜 푹신했다.
젠은 잠시 멈춰서서 좌우를 둘러봤다. 황갈색 흙으로 뒤덮인 지상은 고요했다.
먼지 사이로 제멋대로 무너진 건물들이 먼지 사이로 고개를 삐죽 내밀고 있었다. 벽이 반쯤 무너진 콘크리트 덩어리와 햇빛과 모래에 녹슨 철골이 뾰족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 사이로 마른 모래가 사사샤 소리를 내며 흘러내렸다.
창문은 전부 깨져 있었고, 깨진 유리 조각들이 바닥에 점점이 흩어진 채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그때 바람이 또 불었다. 젠은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jhymuk43 저 멀리 희뿌연 먼지에 가려져 있던 철탑 하나가 기울어진 채 서 있었다. 그리고 철탑 끝에 빛이 걸려 있었다.
철탑 끝을 따라 젠의 시선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태양이 보였다.
눈이 따가웠다. 하지만 눈을 감고 싶지 않았다. 젠은 어떻게든 두 눈을 뜨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순간 두 눈 가득 태양의 하얀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옅은 버터 빛깔이 섞인 빛. 동시에 눈앞이 까맣게 변했다.
젠은 숨을 삼켰다. 발끝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방호복 위로 내려앉은 빛은 따뜻했다. 눈앞이 까매지자 이번에는 그 온기가 온몸으로 파고들었다.
‘아름답다는 말이 이런 거구나.’
아름다운 것을 보면 눈물이 난다는 칼의 말이 떠올랐다. 눈물이 흘러내려 뺨을 간질였다.
헬멧을 벗고 싶다고 생각했다. 헬멧 쪽으로 옮기던 손이 멈췄다.
잠시 후 까맣던 세상이 돌아왔다. 젠은 천천히 걸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헬멧 왼쪽 하단에 빨간 숫자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분명 13:00이었는데 지금은 9:21이었다. 숫자를 한 번 본 젠은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태양도 하늘도 사진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더 선명했고, 더 살아있는 기분이었다.
젠은 방호복 주머니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딱 칼이 보여준 사진이었다.
젠은 칼이 알려준대로 하늘을 올려다 보며 사진을 찍었다. 한장을 찍고 잠시 고개를 내려 카메라를 바라본 젠은 다시 카메라를 들어 한장 더 찍었다.
문득 사진으로만 이 모습을 볼 칼이 불쌍해졌다. 사진만으론 이 아름다움을 담아낼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카메라를 다시 주머니에 넣은 젠은 계속 태양을 바라봤다.
하늘은 구멍 같았다. 끝이 없는 구멍. 그 구멍의 가장 깊은 곳에서 태양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태양은 하나였다. 그런데 너무 많았다. 언더월드는 수많은 등불을 채워야 29층 복도를 끝까지 채울 수 있었다. 하지만 지상은 태양 하나로 모든 것을 채우고 있었다.
젠은 웃었다. 웃음이 헬멧 안에서 맴돌았다. 젠 스스로도 처음 듣는 웃음소리였다. 젠은 자신이 이렇게 맑게 웃을 수 있다는 걸 여태 몰랐다.
삑.
어디선가 소리가 났다. 젠은 잠깐 멈췄다. 헬멧 왼쪽 하단에 또다시 빨 숫자가 떴다.
5:00
이번엔 숫자가 깜박깜박거리더니 더이상 사라지지 않고 천천히 숫자가 변했다.
4:59 4:58
무의식적으로 젠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제서야 젠은 어렴풋이 깨달았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잠깐 숨이 막혔다. 하지만 이내 마음 속 누군가가 말했다.
죽어도 좋아.
젠은 뒤를 돌아봤다.
문은 그렇게까지 멀어보지 않았다. 언뜻 계단도 보였다. 충분히 돌아갈 수 있었다.
젠은 문을 보면서도 어쩐지 태양을 떠올렸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따뜻하고 아름다웠다.
젠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어깨가 살짝 올라갔다 내려갔다. 천천히 손을 들어 방호복의 모자를 벗었다.
순간 바람이 스쳤다. 코 끝으로 처음 맡는 냄새가 밀려들어왔다.
먼지가 바짝 마른 냄새. 햇빛 냄새. 희미하게 달콤한 냄새.
젠은 눈을 감았다.
빛이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따뜻했다.
3:17
삐빅─ 알람이 조금 전보다 더 길게 울렸다.
손에 들고 있던 헬멧을 들자 빨간 숫자가 보였다.
1:04
헬멧을 던지듯 바닥에 내려놓고 천천히 바닥에 누웠다.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태양이 그 가운데에서 빛나고 있었다.
젠은 한 번 더 태양을 바라봤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온몸이 따뜻했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거면 됐어. 태양을 봤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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